왜 많은 사람들이 이해찬의 별세 앞에서 가슴 아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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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플래닛 뉴스입니다.

어제 베트남 출장 중이던 이해찬 선생님이 심근경색 증세로 현지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해찬 선생님은 1952년생으로 향년 73세였습니다.

아직 더 우리 곁에 남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야 할 나이에 갑작스럽게 별세하셔, 많은 민주시민들이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해찬 선생님의 비보 앞에서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걸까요.


한 시대를 버텨온 삶

이해찬 어린 시절 모습
어린 시절의 이해찬

이해찬 선생님은 생전에 몸이 많이 편찮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정치권과 주변에서는, 젊은 시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에 맞섰던 과정에서 겪은 고문과 가혹한 수사의 후유증이 평생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고,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후 신군부 시기에도 민주화 인사로 분류돼 다시 투옥과 강압적 수사를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겪은 인권 침해와 고문은 과거의 한때로 끝난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고문 후유증과 함께 평생 건강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한 원인이 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남아 있는 상처

정치인 이해찬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이해찬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이었던 이해찬 선생님은 사실 얼마든지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고, 자기 인생을 챙기며 조용히 앞날만 생각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보다 먼저,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걱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독재가 당연한 질서처럼 굳어가던 시절,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곧 감옥과 고문, 그리고 인생의 중단으로 돌아왔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이유 하나로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그 후유증은 오랫동안 그의 몸을 괴롭혔다고 전해집니다.

이해찬, 김대중


그럼에도 그는 그 선택을 후회하기보다 끝까지 책임으로 감당해온 사람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말로만 지켜진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삶 위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해찬 선생님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안락함보다 공동체를 먼저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별세 소식 앞에서 단순히 한 정치인을 떠나보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 삶을 내줬던 한 시대의 어른을 떠나보냈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픈 겁니다.


1974년의 기억

노무현 이해찬

이해찬 선생님이 처음 감옥에 갇힌 것은 1974년,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정권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지던 민주화 요구를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 조직으로 조작했습니다.

실제로는 학생과 지식인들이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였습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이었던 이해찬 선생님도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돼 투옥됐고,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이후 국제사회와 국내 여론의 압박으로 형은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는 긴 수감 생활과 가혹한 조사를 견뎌야 했습니다.

젊은 청춘의 시간은 그때 멈춰 섰습니다.


끝나지 않은 탄압

시간이 흘러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다시 반복됩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민주화 인사로 분류된 이해찬
197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이해찬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는 민주화 인사들을 대거 검거했고, 과거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던 인물들은 다시 표적이 됐습니다.

이해찬 선생님 역시 민주화 인사로 분류돼 체포됐고, 다시 한 번 투옥과 강압적 수사를 겪었습니다.

한 번의 투옥으로 끝나지 않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이유로 같은 방식의 탄압이 반복됐던 겁니다.


평번하지 않았던 선택

이해찬의 모습
이해찬

두 차례의 투옥과 조사 과정에서 이해찬 선생님은 고문과 가혹한 수사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고문은 몸과 마음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고, 그 후유증으로 생전에 많이 편찮으셨다는 이야기도 이어져 왔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이유 하나로 젊은 시절 두 번이나 삶이 멈춰야 했던 시간. 이해찬 선생님의 인생에서 이 시기는 끝내 비켜갈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떠오른 장면

문득 “영화 1987 속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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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하러 가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껴요? 가족들 생각은 안해요? 그날 같은거 안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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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너무  마음이 아파서

실제 대사인지 여부를 떠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의와 폭력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아팠기에…

이해찬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민주화 인사들 역시 같은 선택의 자리에 서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는

혁신과 통합을 강조하는 이해찬
혁신’과 ‘통합’을 강조하던 모습

민주주의의 소중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리가 정치인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 직접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지난해 12·3 사태 이후에도 민주 질서를 지켜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요.

어쩌면 그 답은 과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지킨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처럼, 이해찬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이 독재와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던 시간,

그 선택과 희생이 쌓여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자유와 권리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과 책임 위에서 이어져 온 결과라는 사실.

이해찬 선생님의 삶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조용히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관련 영상보기 – MBC 뉴스


이해찬 선생님,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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